[뉴스엔뷰] 안중근 의사 탄생 135주년을 맞은 9월 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철거' 소식이 뒤늦게 전해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기념비는 지난 2002년 서울보건식학연구원과 블라디보스토크 주립의과대학이 MOU를 체결하면서 건립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측은 기념비 철거에 대해 별 다른 설명 없이 기념비만 덩그러니 세워졌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새로 취임한 주립의과대학 총장이 기념비의 의미를 잘 모르고 철거했다고 해명했다.
기념비만 세워놨을 뿐, 국가보훈처나 당국의 지속적인 관리가 없었던 것이다.

철거 후 블라디보스토크 시청에 보관 중이던 기념비는 우수리스크에 있는 한인이주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당시 안중근은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가로 나라를 위해 활동한 안중근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안중근은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일본인 사이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숨을 거뒀다.